계획과 현실 사이의 간격
작년 10월, 노후 자산 배분표를 만들었다. 예금 40%, 펀드 35%, 채권 15%, 현금 10%. 엑셀에 정리하고 그 계획에 따라 통장을 쪼갰다. 첫 달에는 정말 잘 지켜졌다. 월급 450만 원이 들어오면 180만 원은 예금, 157만 5천 원은 펀드, 67만 5천 원은 채권, 45만 원은 현금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한 푼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3개월이 지난 지금, 통장을 보니 계획이 완전히 흐트러져 있었다. 예금에만 600만 원이 쌓여 있고, 펀드는 생각보다 덜 들어가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현금으로 남겨둔 45만 원이 자꾸 손을 가는 바람에 펀드 매수 계획을 미뤘던 것이다. 그리고 채권은 어떻게 사는지 헷갈려서 아직도 손도 못 댔다.
이 경험이 중요했다. 자산 배분 계획은 세우는 것보다 지키는 게 훨씬 어렵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배분 계획이 자꾸 흐트러지는 이유
처음 계획을 세울 때는 모든 게 명확하다. 하지만 실제로 돈을 나누기 시작하면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긴다.
첫째는 심리 문제다. 펀드나 채권에 돈을 넣으면 그 돈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예금은 통장에 숫자로 보이니까 안심이 된다. 그래서 자꾸 예금 쪽으로 쏠린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월급이 들어오면 일단 예금부터 채우고, 남은 돈으로 펀드를 사려고 했는데, 현금으로 남겨둔 45만 원이 자꾸 필요해 보였다.
회사 야외활동 참가비 10만 원, 친구 생일 선물 8만 원, 예상 못 한 약국비 6만 원. 이렇게 자잘한 일들이 생기면서 펀드 매수가 미뤄졌다.
둘째는 실행의 복잡성이다. 예금은 통장에 입금되면 끝이지만, 펀드나 채권은 어디서 사고 어떤 상품을 고를지 결정해야 한다. 지난 3개월간 나는 ‘어떤 펀드를 사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결국 미루게 됐다. 채권도 마찬가지였다. 채권 펀드? 채권 ETF? 국채? 각각의 차이를 몰라서 손도 못 댔다.
셋째는 시장 심리다. 펀드를 사려고 하다가 최근 장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지금은 좀 더 기다렸다가 사자’는 생각이 든다. 그 ‘기다림’이 3개월이 되어버렸다.
현실에 맞게 배분을 다시 조정하기
3개월간의 경험으로 나는 배분표를 수정했다. 원래 계획은 예금 40%, 펀드 35%, 채권 15%, 현금 10%였다. 이번에는 현금을 15%로 늘렸다. 월급 450만 원 기준으로 현금 67만 5천 원이다. 이 정도면 예상 못 한 지출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펀드와 채권을 합쳐서 ‘장기 자산’이라고 묶었다. 펀드 35%, 채권 15%를 구분하지 말고, 합친 50%를 ‘장기 자산 통장’에 넣기로 했다.
그 안에서 어떤 비중으로 펀드와 채권을 나눌지는 분기마다 한 번씩 검토하기로. 이렇게 하니까 ‘어떤 상품을 골라야 할까’라는 고민이 줄었다.
일단 장기 자산 통장에 돈을 넣고, 그 다음에 천천히 고르는 방식으로 바꿨다.
예금 비중도 40%에서 35%로 줄였다. 현금이 충분하니까 예금까지 40%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예금은 금리가 좋은 상품으로 정했다. 현재 정기예금 금리가 약 3% 정도니까, 이 부분에서 월 13만 원 정도의 이자가 생긴다.
배분을 지키기 위한 작은 장치들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실행을 돕는 작은 장치들을 만들었다.
첫째, 자동이체다. 월급이 들어오는 날 다음날 자동으로 각 통장에 돈이 이동되도록 설정했다. 예금 157만 5천 원, 장기 자산 225만 원, 현금 67만 5천 원. 내가 선택할 여지를 없앴다. 이렇게 하니까 현금으로 남겨둔 돈을 펀드에 쓰고 싶은 유혹이 줄었다.
둘째, 분기 리뷰다. 3개월마다 통장을 정리하면서 ‘이번 분기에 배분이 잘 지켜졌나’를 확인한다. 예를 들어 이번 6월에 확인해보니 예금이 계획보다 50만 원 더 쌓여 있었다. 그럼 그 50만 원을 장기 자산 통장으로 옮긴다. 이렇게 분기마다 조정하면 큰 틀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셋째, 자산 배분 비중을 간단하게 유지하기다. 처음에는 예금, 펀드, 채권, 현금 4가지로 나눴는데, 이게 너무 복잡했다. 지금은 통장을 3개로 줄였다. 예금 통장, 장기 자산 통장, 현금 통장. 이렇게 하니까 월급 관리가 훨씬 쉬워졌다.
지금, 다시 3개월 뒤
조정된 배분으로 3개월을 더 지내본 지금, 통장 상태가 계획에 훨씬 더 가까워졌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다. 그리고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자산 배분은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계획을 세우고, 그걸 지키려고 노력하고, 3개월마다 점검하고 조정하는 반복이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배분이 만들어진다.
혹시 자산 배분 계획을 세웠는데 잘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건 계획이 잘못된 게 아니라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 계획을 고쳐도 된다. 그게 자산 배분의 첫 번째 배우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