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이 들어온 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작년 9월에 회사를 그만뒀다. 20년을 다닌 곳이었다. 퇴직금은 2억 3천만 원이었다. 통장에 입금된 그 날 오후, 나는 펀드 앱을 켰다가 끝내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며칠 뒤 지인이 연금저축펀드를 추천했고, 또 다른 사람은 변액보험이 낫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돈을 그냥 정기예금에 넣어뒀다. 3개월 뒤 깨달았다. 그게 정답이었다는 걸.

퇴직금 운용은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첫 3개월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현명할 수 있다. 그 사이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확인할 것: 퇴직금이 정말 전부인가
퇴직금만 있는 게 아니다. 퇴직연금이 있을 수 있다. 나는 회사를 그만들 때 퇴직금 2억 3천만 원 외에 퇴직연금 3천 5백만 원이 따로 있다는 걸 한 달 뒤에 알았다. 회사에서 별도로 공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은 확정급여형인지 확정기여형인지에 따라 다르게 운용해야 한다. 내 경우 확정급여형이었는데, 이건 이미 회사가 적립해둔 것이라 내가 할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확정기여형이라면 내가 직접 운용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세금을 더 낼 수도 있다.
퇴직금과 퇴직연금을 합친 총액이 얼마인지, 그리고 각각이 어떤 형태인지 먼저 파악하는 데 최소 2주는 걸린다. 회사 인사팀에 연락해야 하고, 은행에도 확인해야 하고, 때론 세무사와 상담해야 한다.
두 번째 확인: 앞으로 생활비가 정말 필요 없나
퇴직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실수한다. 나는 처음 3개월간 월 생활비로 약 250만 원을 썼다. 집세, 식비, 보험료, 통신비. 일하지 않으니 시간은 많은데 돈은 생각보다 빨리 나갔다.
퇴직금 2억 3천만 원을 모두 투자했다면, 긴급 상황에 돈이 필요할 때 곤란했을 것이다. 펀드를 팔려면 며칠이 걸리고, 손실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6개월치 생활비인 1천 5백만 원을 따로 정기예금에 뒀다. 금리는 연 약 3% 정도였다. 투자 수익률보다 낮지만, 마음의 평안이 있었다.
실제로 이 6개월 사이 치과 치료비 180만 원, 차량 정비비 320만 원이 나갔다. 투자금에서 이걸 빼야 했다면 손실을 감수하고 팔아야 했을 것 같다.
세 번째 확인: 언제부터 일할 계획인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는 당장 일할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투자 전략은 일의 유무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만약 3개월 뒤 새 직장을 다닐 예정이라면, 퇴직금은 공격적으로 투자해도 된다. 월급이 계속 들어오니까 손실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몇 년간 일하지 않을 계획이라면, 안정성이 중요하다. 변동성이 큰 주식펀드보다는 채권펀드나 혼합펀드가 낫다.
나는 결국 2억 원을 혼합펀드(주식 40%, 채권 60%)에 넣었다. 연 수익률은 약 약 4% 정도였다. 단순히 예금에 넣었을 때보다 약 0% 높지만, 변동성은 훨씬 낮았다. 6개월 뒤 손실을 본 달도 있었지만, 1년 뒤엔 수익이 났다.
실제로 운용하며 깨달은 것
퇴직금을 받은 지 1년이 되어가는 지금, 내 계좌는 다음과 같이 나뉘어 있다. 정기예금 1천 5백만 원(연 약 3%), 혼합펀드 2억 원(연 약 4%), 연금저축펀드 5천만 원(연 약 3%). 총 수익률은 약 약 4%다. 연 900만 원 정도의 이자와 투자 수익이 생기는 셈이다.
처음 3개월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덕분에 나는 급할 일이 생겼을 때 현금을 꺼낼 수 있었고, 투자 전략을 차분히 세울 수 있었다. 만약 그때 한 번에 모두 투자했다면,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 같다. 퇴직금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다. 그 전환점에서 3개월간 멈춰서 생각하는 것. 그게 가장 현명한 첫 번째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