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이 들어온 날의 착각
작년 11월, 20년 다닌 회사를 나왔다. 퇴직금 통장에 2억 3천만 원이 입금되던 날 오후, 나는 증권사 앱을 켰다. ETF 3개를 살펴봤고, 펀드 상품도 훑어봤다. 그날 밤 가족들은 축하 밥을 먹으러 나갔는데, 나는 호가창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려다가 계속 멈췄다. 그게 정답이었다는 걸 3개월 뒤에 알았다.
첫 달은 통장에, 두 번째 달부터 계획
퇴직금이 생기면 당연히 바로 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금리가 떨어지니까,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다.
퇴직 직후 3개월간 나는 예상 밖의 지출이 많았다. 먼저 건강검진을 다시 받았다.
회사 검진과 다르게 제대로 하려니 병원비가 150만 원대였다. 그 다음은 치과다.
미뤄두던 임플란트와 크라운 치료를 시작했고, 첫 달에만 180만 원이 나갔다. 집 수리도 있었다.
20년 살던 집의 에어컨 실외기가 고장 났고, 욕실 방수도 손을 봐야 했다. 이게 또 250만 원이었다.
회사 다닐 때는 이런 것들을 미루고 미뤘다. 휴가를 내서 병원 가는 것도 번거롭고, 집 수리는 주말에 간단하게만 했다. 퇴직금이 들어오자마자 그동안 미뤄둔 것들이 한꺼번에 터졌다.
생활비가 생각보다 많이 든다
두 번째 발견은 월 생활비였다. 회사 다닐 때는 월급이 들어오니까 그걸 기준으로 썼다. 월 220만 원 정도가 평균이었다. 그런데 일을 그만두니 패턴이 달라졌다.
외출이 늘었다. 시간이 생기니까 아내와 카페도 자주 가고, 영화도 보러 가고, 주말에 근교 여행도 다녔다. 첫 달에는 월 280만 원, 두 번째 달에는 310만 원이 나갔다. 이전보다 월 60만 원에서 90만 원이 더 들었다.
식비도 올랐다. 점심을 회사 구내식당에서 먹을 때는 4,500원이었는데, 이제는 밖에서 먹으니 평균 12,000원이다. 일주일에 5번 먹으면 월 차이가 37만 원이다.
3개월 뒤, 진짜 필요한 금액이 보였다
3개월이 지나고 통장을 정리해 봤다. 의료비와 집 수리, 그리고 생활비 변화를 모두 합쳐서 퇴직금에서 나간 금액은 약 1,200만 원이었다.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 기간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퇴직금 2억 원 전부를 투자했을 것이고, 그 중 일부를 다시 빼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대신 지금 나는 명확했다. 앞으로 필요한 월 생활비는 280만 원이 기준이라는 것. 그리고 매년 예상 밖의 지출이 200만 원에서 300만 원 정도 생긴다는 것.
그 다음부터 시작한 운용
4개월째부터 나는 퇴직금을 나눴다. 먼저 1년치 생활비 3,500만 원을 정기예금에 넣었다. 금리는 약 3%였다. 그 다음 예상 밖의 지출을 위해 500만 원을 별도 통장에 뒀다. 남은 1억 8천만 원을 운용 자금으로 정했다.
그 1억 8천만 원도 한 번에 넣지 않았다. 월 3천만 원씩 6개월에 걸쳐 넣기로 했다. 첫 달에는 미국 배당주 ETF 2,000만 원과 채권 펀드 1,000만 원. 두 번째 달에는 한국 고배당 ETF와 해외 채권을 섞었다. 이렇게 6개월을 분할해서 넣으니 심리적으로도 안정적이었고, 시장 타이밍에 대한 불안감도 없었다.
퇴직금 운용은 서두르는 게 아니었다
지금 돌아보니 그 3개월의 대기가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 많은 사람이 퇴직금이 들어오면 금리 손실을 생각해서 바로 투자한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실제 생활비가 얼마인지, 매년 얼마나 예상 밖의 지출이 생기는지, 그리고 정말 투자에 쓸 수 있는 금액이 얼마인지를 말이다.
퇴직금 운용은 서두르는 것보다 정확한 것이 훨씬 중요하다. 3개월의 대기 기간이 앞으로 20년, 30년의 운용을 결정한다.